2009/12/19 18:08

Je respecte n'importe quelle loi dure y aurait. Mots vains


이 글을 보니 예전에 여의도에 벚꽃놀이를 갔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아마 번데기를 팔던 노점이었던 것 같은데 단속공무원들이 별안간 들이닥쳐 집기들을 모두 수거해서 가버렸다. 뚜렷하겐 기억나지 않지만, 순간적으로나마 저걸 저대로 두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는 다소 저항과 몸싸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조금 지켜보고 다시 갈 길을 갔더랬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싶지도 않고 정의감이 강한 것도 아니며, 그것이 직관적으로는 부당해 보여도 거시적으로는 온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체계, 추상적인 인식 너머로 그것을 꿰뚫어 볼 엄두를 내기조차 힘든 그 거대한 구조는 항상 저 깊은 곳에서 내 어깨를 붙든다. 그것은 정의에 토대를 둔 동시에, 형상화한 정의라는 근원회귀적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옳거나 그르거나, 착하거나 나쁘지 않다. 그래서 법이란, 또 질서란 도무지 정감이 가지 않는 차가운 구조다. 그러나 차가울 때만이 그것은 세계를 따듯하게 지켜줄 수 있지 않나 하는 아주 막연한 생각도 든다.

문제는 이 차갑고 거대한 구조를 인식하면서도, 그 인식이 상대적으로 사소한 일상을 무채색의 무감동한 풍경으로 물들게 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까 하는 점이다. 법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만 옳을 수 있다. 법이란 도덕관념이나 윤리, 관습 등을 가장 결정적인 형태로 추출해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추상은 한없이 거대해 보일 때에도 가장 최소한의 크기로 존재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현실이란 압도적인 존재를 가늠하기에 법은 너무나도 왜소한, 그러나 우리가 가진 가장 최선의 도구이다. 그러니 다른 도구를 고안할 수 없는 한, 법이 현실을 왜곡할 때 그 왜곡에 무감각해지지도 말고 그렇다고 조금의 성찰도 없이 흥분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억압되는 세계를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관심이, 쉽게 타오르거나 금방 꺼지는 일이 없는 냉철한 관심이 내 생각의 틀에서 당장 꺼낼 수 있는 대답들 중에서는 가장 올바른 것 같다. 어느 노점상의 눈물에 동화되면서도, 그 노점상의 집기를 수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단속공무원의 고단함에도 연민을 느낄 줄 아는 관심(그것이 아주 서글픈 일임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깊은 연민을 느껴야 한다), 왜 고단한 누군가가 고달픈 누군가의 삶을 뒤흔들지 않으면 안 되며, 고달픈 그 누군가는 또 어떤 이유로 고단한 누군가에게 그 서글픈 운명의 짐을 지게 만드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을 확장해나가는 관심,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인을 '대한민국 1%' 같은 편리한 개념적 허구에 떠넘기고 ─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2MB 욕만 하고 자기 관심사로 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 자신을 언제나 바른 편에 두는 것으로 만족하는, 스스로를 관심으로 가장해서 더 섬뜩한 그 무관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경계심을 품을 줄 아는  관심, 그런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1%의 빅브라더에게 휘둘리고 사는 99%가 아니다. 우리에게 이로운 문제에 대해서는 그 허구적 1%에 내색 않고 포함되길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없거나 또는 해로운 경우에만 기꺼이 99%로 돌아서 1%를 비난하기 좋아하는 경계적 존재이다. 그 태도를 아주 조금이라도 바꿀 생각이 없는 한, 2MB든 딴나라당이든 아무리 더러운 족속들을 더럽다 욕하여도 그것으로 누군가의 눈물이 마르는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한번이라도 돌팔매질을 하던 그 손을 거두어, 그 옆에 주저앉아 서럽게 흘리는 눈물을 닦기 위해 내밀어 본 사람이 ─ 상징적인 표현임에 유의하라 ─ 몇이나 될까? 더군다나, 그 애처로운 눈물을 닦아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노점이 철거를 부를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해 본 사람은? 김밥이나 튀김 등 온갖 길거리 음식들의 위생문제에 대해 깊은 혐오를  느끼면서도 ─ 사람에 따라선, 노점 철거를 위한 정부의 음모론으로 이해하면서 정부에 대한 혐오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 어떻게 그들을 거절하지 않고 도와주어야 할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이 모든 요구는 너무나도 진지한 참여를 요구한다. 나로서도 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태하지는 말아야 한다. 게을러서 가지 않으려는 그 길이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것마저 외면하면서, 나도 그 길을 걷고 있는 척 하는 것은 너무 치사하지 않나.

그런 점에서 민노 씨의 원글에 달린 리플들은 나로서는 어느 정도는 현시대의 나태를 증명하는 하나의 징표로 보인다. 물론, 농담거리를 농담으로 삼는 수준의 가벼운 시도도 있을 거고, 어쩌면 모든 리플이 그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할 수도 있다. 아마도 늘 그렇듯이, 내가 너무 사실을 확대해석하고 비현실적인 결벽적 태도를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모든 가능성음 염두에 두고 이 얘기를 걸러 듣는 건, 내 생각에 사로잡힌 내 몫이 아니라 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면 충분할 것 같고, 여하튼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그 리플들에서 떠올린 것은 이 시대의 대중들에겐 이런 현상을 접하고 그를 통해 정부를 비난하는 것이 하나의 심리적 소비행위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고민이라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정부라는 그럴싸한 대상을 난도질함으로써 만족감이라는 대가를 누리는 소비.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나는 이런 일을 통해 어떤 생각을 끄집어내야 할지 도무지 결정하지 못하게 된다. 누구를 비판하고 누구를 비난할 것이며, 무엇을 제안하고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아니 그전에, 나는 내 손으로는 무엇 하나 실행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럼 내가 고민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왜 이렇게나 모순적인 인간인가 따위의 문제들로 한없이 흔들릴 뿐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론이 아니다. 그냥 불분명한 내 생각의 파편들이다. 그 파편의 하나는, 그것이 불법인 한, 노점을 단속하게 하는 법적 근거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실행하는 단속공무원들은 단순한 표피에 불과하므로 비난해 본댔자 의미가 없을 것이며, 그 모든 집행의 근원에 존재하는 관료들, 대통령도 그것이 일관성 있게 진행되는 한 내 입장은 마찬가지다(그 점에서, 난 김문수 경기도지사 덕에 많은 편리를 누리고 사는 경기도민이라 생각하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오늘 민노 씨 블로그에서 링크를 따라가 읽은 프레시안에 실린 김문수 지사와 김영동 전 경기도립국악단 예술감독 사이의 일은 강하게 비난하고 싶다). 다른 생각의 파편은 이렇게 말한다. 법이 일관성 있게 시행된다고 해도, 법 자체가 비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을 경우도 있고,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하는 법도 있을 수 있으며, 그런 법일수록 오히려 철저하게 이행되는 경우가 많고, 사회의 기득권 세력일수록 교묘히 법적 제재를 회피하거나, 심지어 같은 법이 예외적으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라고 거기에 뾰족한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 정말이지 잘 모르겠다. 언젠가는 세계가 ─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 더 성숙해지는 날이 정말 오려나. 얘기를 하다 보니 다른 파편도 덩달아 떠오른다. 건강 문제니, 경제적 손실이니 해가면서 사면에 집유를 남발하는 덜 떨어진 세태. 제일 오래 공부한 사람들이 맨날 그렇게 뻔하고 한심한 판결이나 내놓아야 하는 이 구조를 대체 무슨 수를 써서 바꿔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면 항상 등장하는 기사들도 끔찍하다! '흔들리는 모그룹, 미소짓는 외국 경쟁사' 따위의 부끄러운 문장들. 왜곡의 수정이 파국을 불러오니 그것을 바로잡지 말자고? 물론 나도 겁난다. 정의에 대한 수수한 요구가, 이른바 국익의 심각한 손실로 돌아와 결국 내 생활의 질을 손상시키면 어쩌지? 그것을 저어하면서, 대한민국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비판은 불평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대기업 총수들이 마땅한 부정의 몫을 치르는 것으로, 그렇게 손쉽게 위기에 처한다는 이 한국은 도대체 얼마나 부실한 토대 위에 세워진 커다란 성수대교, 부실공화국인지를 생각하면 서글프기 짝이 없다. 이렇게 한편으론 정의실현의 선결과제로 인한 내 손해를 염려하고, 다른 한편으론 세상의 부정이 씻어지기를 희망하는 나 자신의 부조화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고민하면 끝이 없다. 아니 고민만 하니까 끝이 없다. 고민만 하는 게 다를 뿐, 나 역시 행동하기가 싫기는 마찬가지니까. 그 점이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파편과도 상관성이 있다. 나는 법을, 그것이 부당해 보일 때에도 정당한 절차를 거치는 한 존중하고 싶다. 그러나 그 부당함의 방향이 내게 향할 때에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을 정도로 대범하지는 못하다. 그것은 대범한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자신에 대해서조차 무관심한 초탈이다. 그것도 하나의 경지인 건 분명한데, 나는 거기에 이를 수도, 그렇다고 행동할 수도, 딱부러지게 무언가를 부정하지도, 그렇게 아무것도 하질 못한다. 내 생각의 껍질이란 게 이렇듯 연약하다. 그걸 볼 줄 아는 것만이 내 유일한 강함이다. 내가 나약하다는 것, 그 인식만이 이 무채색의 세계에서 이토록 모순적인 나를 끌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자 하는 의지를 일깨우는 유일한 동력, 조각난 동력원이다.

덧. 제목 얘기를 깜박했다. 좋아하는 시 중에 Invictus가 있다.

I thank whatever gods may be 
For my unconquerable soul.

나를 기다리는 신이 그 어떤 무엇이라 해도
정복되지 않는 이 영혼에 대해서는 감사히 여긴다.

이 구절을 조금 바꿔보고 싶었다. '아무리 가혹한 법이라도 존중한다.' 물론 그 법이, 최대한 합리적인 토대 위에 서있기를 나는 바란다.

덧2. 본문 아래에 트랙백 표시도 뜨고 트랙백 주소도 뜨는데, 정작 다이렉트 링크는 없다. 뭐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수동으로 링크를 걸어서 해결은 했다. (...) 점점 어이가 없어진다. 주소를 치고 바로 들어오면 트랙백 정보가 절대 보이지 않는다. 메뉴에서 카테고리를 선택한 다음에야 관련정보가 뜨게 되어 있다. 스킨의 문제일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이런 폐쇄적인 구조는 정말 한심하다(내가 모르는 기술적 맥락이 존재해서 그런 거라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보충(09. 12. 20) - 이런 인식은 분명히 문제점이 있다고 ─ 원글의 논점에 대해서, 일종의 논점일탈의 오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생각하면서도, 지금 생각건대 제가 이 글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노점은 2MB 정부에서만 단속되어온 것도 아니고, 상징적인 대비 속에 2MB를 단순히 깎아 내리려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2MB보다 더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고 더 길게 살아남을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는 식일 것 같습니다. 제가 그 노점철거를 본 건 노무현 정부 때였고, 공익요원으로 복무한 첫날 밤에 지원업무로 노점철거 현장을 지켜보기도 했던 기억이 오버랩되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2MB만 그런 것도 아닌데 2MB 까지마!-같은 취지는 당연히 아니지만, 2MB라는 단순한 상징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구조적 문제임을 주지시키고 싶었겠죠,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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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2/19 21:0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icelui 2009/12/19 22:51 #

    그랬군요. 먹먹하고 씁씁하게 읽히는 얘기입니다. 정말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겠어요. 저도 이런 글만 쓰지 말고, 같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로라도 제 게으름을 조금 덜고, 혹은 과정이나 상황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마음도 잠시 밀어두고 조그마한 행동이라도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네요. 자칭 중도적 입장이니 제가 더 그래야 맞는 게 아닌지. (...)

    오늘 리플은 사실 깜짝 놀라며 읽었습니다. 그걸 마땅한 일로, 번거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는 게 저로선 놀라워서요('조문 갈 때는 정장' 같은 기본적인 상식도 제가 좀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나이가 들어야 저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변명을 괜히 해봅니다.
  • 민노씨 2009/12/20 18:21 # 삭제 답글

    아주 진지하고, 성실하며, 심오한 고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건조하게 정돈되었지만, 치열하게 흔들리는 그 사유의 결이 느껴집니다.
    특히 "경계적 존재"라는 지적에 대해선 아주 공감합니다( 제가 언젠가 썼던 글도 연상되구요... http://minoci.net/520 )

    언제 이슬뤼님과 이 문제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보고 싶네요.

    다만 이슬뤼님께서도 충분히 인식하고 계신 문제이긴 하겠습니다만,
    1. 현시스템이 추상적인 법질서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고민하는 국가공권력의 구체적인 행사를 보여주고 있는가라는 점에서는 깊은 회의가 들고,
    2. 또 한편으로는 법이라는 사회 근간을 형성하는 합목적인 사회시스템이 만들어낸 그 약속이 그저 정치적 약육강식의 면제부 역할을 하고 있는 이 현실은 법이라는 '시민사회의 최후 보루'를 세계의 질서를 '합법적으로 파괴하는 기만의 체계'라는 적극적인 인식으로 비판해야 할 필요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3. "나태의 징표"라고 하신 부분은 한편으로는 스스로 반성하는 의미에서 기꺼이 공감합니다만, 너무 성급하고, 단정적인 해석이라는 생각도 한편에서는 듭니다.

    아무튼 조만간 한번 시간나시면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요. : )
    혹 스카이프 하시나요?
    아무래도 가장 경제적이고, 편리한 방식은 스카이프를 통한 대화인 것 같아서요.

  • icelui 2009/12/20 22:17 #

    1에 대해선 표면적으로 ─ 뉴스나 신문 등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내용들을 ─ 볼 때 우리나라가 대체 그런 고민을 법조인들에게 허락하기나 하는 구조인지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가끔 보이는 사설 같은 글들을 볼 때, 그럼에도 고민할 줄 아는 법조인들은 진지하게 그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으리란 짐작도 됩니다. 여하튼 별로 그 문제를 깊게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저로서도 지금 이대로 계속 변하지 않는 게 아닐까 싶은 비관적 전망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보다 상식적인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는지 조금 궁금해지네요.

    2는 그 인식에 공감은 하면서도, 그 심각성 때문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적어도 10년은 더 살아보고, 본격적으로 한국의 기성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체감해 보고 나서야 지식으로서가 아닌 체험으로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지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3은 그 글을 적으면서도, 나중에 다시 읽으면서도 과격하지 않을까라고 스스로도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감정이 사실 이 글의 주요 동기였기 때문에 그대로 내어놓으면서, 최대한 걸러 들어달라고 부탁만 해두었습니다. 시작은 그 리플들에서 순간적으로 받은 인상이었지만, 사실 그 리플들 자체를 비난하기보다는 ─ 거기에 리플 다는 사람들이 평소에 어떤 생각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제가 다 검토해 본 게 아니니까요 ─ 이런 이슈를 쉽게 소비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강하게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혹여 개중에,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그것도 좋으리라 생각했고요. 그러니 적으신 대로 '스스로 반성하는 차원'에서 필요한 정도로만 받아들임이 옳으리라 봅니다. 저도, 염려했던 인상이 실제로 전달되었다는 점에 대해선 다음에는 어떻게 더 완곡하면서도 동의할 만한 표현을 만들어낼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덧. 스카이프가 뭔지 찾아 봤더니 인터넷 전화더군요. 헤드셋이 집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음성 소통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나, 혹은 메신져라는 도구의 삭막함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게 없으시다면 네이트온이나 MSN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떠신지요? ㅇ_ㅇ;
  • icelui 2009/12/20 22:37 #

    위 리플을 적고 해당 링크를 따라 가서 읽었는데 더 내용을 이어갈 필요를 느낍니다. 저 역시 그때, 투표라도 하고나야 한국 정치는 개판이야라는 말을 해도 할 수 있는 것 같아서 투표를 했습니다. 정동영이 1%의 신뢰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 전 손학규가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 이명박한테 표를 주었고요. 상식 있는, 아니 정치적 이득에 구애받지 않는 유권자라면 누구나 최악을 피해 차악을 택했을 시기에 제 생각엔 이명박이 차악이었습니다. 이 정권의 막무가내식 운영방식에는 새삼 그 뻔뻔함에 놀랄 기운도 남아있지 않은 지금에도, 다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어야 했다는 강한 확신이 들지는 않습니다. '늑대에게 물릴 수 없어서 그렇다고 코뿔소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어야 하는가', 그러니까 어느 쪽이든 위험하긴 매한가지다 라는 뭐 그런 느낌인데, 문제를 대하는 바른 자세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심정은 그렇습니다. 스스로의 선택을 합리화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좀 들고 그러네요.

    아무튼 제가 현상을 대하는 방식은 다 그렇습니다. 남들이 다 너무나도 분명하다고 떠드는 사안이라도, 그런 의견들에 적당히 귀를 기울이면서도 결국에는 제가 생각하려 애쓰고 미숙해도 온전히 ─ 아니 다른 글들에 영향을 받지만 그래도 최대한 ─ 제 노력의 산물인 결론에 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황우석 사태가 결국은 사기극이라는 ─ 황우석 씨 본인이 얼마나 인지하고 어디까지 개입했는지에 대해선 애매하다고 여기긴 하는데 ─ 결론에 다다랐을 때도 그랬고(제 기억엔 이때 캡콜드님의 블로그에 처음 방문했었습니다), 광우병 파동이 한창일 때 '광우병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은 비합리적이고 광기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릴 때도 그랬습니다. 그때는 3일 정도 브릭 같은 커뮤니티와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며 관련 자료들을 읽었었는데, 다 기억나진 않지만, 소화기를 통한 광우병의 감영경로를 증명하려는 연구가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다든가(뇌에다가 직접 고농도 배양액을 주입한 끝에서야 겨우 광우병 감염에 성공했다더군요), 변형 프리온에 대한 여러 이견 등 논란의 여지가 너무나도 많았었죠. 그렇게 확인한 내용들에 대해서 어느 쪽의 반론이 더 강한 설득력을 갖는지 따져보았는데, 제가 찾을 수 있는 여력을 모두 동원해서 알아본 결과로는 광우병의 위험을 전적으로 배제할 증거는 갖고 있지 못해도, 개연적으로 ─ 여기서의 개연성은 통계적 개연성이겠죠 ─ 그것이 무시될 수준이라는 결론 정도는 내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국은, 초등학생이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라는 피켓을 들고 있질 않나, 2020년에 대한민국이 광우병으로 파탄에 이른다는 내용의 만화가 유행하질 않나, 이거야말로 성찰이 부재한 집단적 광기의 소용돌이구나 싶은 그런 풍경이었던지라, 학교에서 그런 관점에서 학우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끔찍하다는 표현을 쓸 때 느끼는 감정들은, 이런 인상들과 강하게 겹쳐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때도 학우들과 얘기하며 지적받은 내용이고, 민노 씨도 여러 번 느끼셨겠지만 결국 제가 문제를 제기하는 관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적 태도가 될 수밖에 없고, 비판적 세력의 자성을 요구하면서도 사실 그 자성 자체보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의 문제에 몰두하느라 결국 문제제기의 시발점이 되는 대상을 간접적으로 지지하게 되곤 합니다. 가령, 광우병 사태가 제 눈에 아무리 집단적 광기로 보였다 해도, 거기에 걸린 맥락은 너무나 다양해서, 잠재적 수준의 위헝성이라 해도 그것을 과장되게 반대하는 것은 ─ 이것이 국가 간 협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 일종의 정치적 수사로서 의미가 있다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같은 맥락에서 긴 시간을 들여 국민과 소통하고 설득하려는 태도를 가질 만큼 성숙해 있지 못한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한데, 이 모두를 한 데 섞어 집단적 광기로 평가하는 건 너무 기만적인 행위이고, 그런 판단을 바탕으로 제가 촛불 시위의 가치를 평가절하할 때는 자연히 정부 입장에선 방관적인, 방관 그 자체로 지지가 되는 효과를 누린 것일 테니까요. 생각하기에 따라선 정부를 옹호하지는 않아도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결과적인 옹호를 한 부분도 있고요. 시간이 좀 오래 걸려도 그런 제 행동들이, 가장 강력한 비판, 스스로에게 엄격함으로써 대상에게도 엄격할 수 있는 합리적 비판의 문화 형성에 기여하는 쪽으로 작용하게 되면 지금 느끼는 불편함들이 덜어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합니다. // 그런데 저를 장말 불편하게 하는 족속들이 있으니, 미국 소고기 수입하자고 해놓고 손도 대지 않는 당국자들, 정치인들, 기타 이해관계자들입니다. 전 딱히 이득 볼 것도 없는 사람임에도 나름대로 내린 결론을 좇아 그네들 고기도 먹어도 보고 그랬는데, 이 덜떨어진 인간들은 합리적이지도 못하고 용기도 없으면서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국익을 놓고 판단하자는 말만 붕어처럼 뻥긋뻥긋 지껄여 놓고 하는 짓은 붕어만도 못한 주제에 ─ 창피해서 자살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 도대체 부끄러움이 뭔지조차 모르니, 이네들에 나랏일을 맡겨 놓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생각할수록 한심하고 처량해집니다.)

    항상 옳을 수 없겠고, 오히려 틀릴 경우가 더 많겠지만 적어도 남의 생각에만 기대지 않고, 그래서 틀린 나를 꿋꿋이 부딪치다가 너무 심하게 틀렸다면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기에 주절주절 적어놓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요즘 같은 세상에 난 2MB한테 투표했다는 말을 친구들한테는 해도, 이런 데 적는 건 좀 꺼려지네요. 이오공감 같은 데 올라가면 전 못 견뎌낼 듯;)

    덧. 그 황우석 사태 때, 지금은 어떤 블로그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블로그에 제가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아 늘 외우고 다니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
    Once you fool me shame on you,
    twice you fool me shame on me.

    이제 더이상 속는 건 당신들 탓이다.
    --------------------------------

    속지 않기 너무나 힘든 세상, 그래도 속지 않으려고 버둥거리고 있습니다. ㅇ_ㅇ;
  • 민노씨 2009/12/20 18:25 # 삭제 답글

    추. 아참.
    - 노점을 단속하게 하는 법적 근거를 존중(하)다는 것이다.
    - 정의에 대한 (수)수한 요구가, 이른바 국익의 심각한 손실로 돌아와

    추2.
    덧2.는 무슨 이야기인가요?

    추3.
    제 글에 보내주신 트랙백은 일단 삭제하겠습니다(삭제하고, 다시 트랙백을 보내고자 하신 것 같아서).

    추4.
    아, 이건 전부터 궁금했던 것인데...
    제목을 불어로 짓는 이유는 검색노출도를 제한하기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그저 이슬뤼님의 '놀이'(취향)인가요?
  • icelui 2009/12/20 20:29 #

    고맙습니다. 존중한다는 고쳤고, 수수한 요구의 경우 소박한 요구라는 의미로 사용한 건데, 순수한 요구라고 해도 말이 잘 통하고 오히려 그 편이 더 문맥이 매끄럽기 때문에 지적해주신 것 같습니다.

    이글루의 트랙백 시스템에 대한 불만의 글입니다. 같은 이글루 사용자의 글을 트랙백해 오면 본문 위에 해당글에 대한 다이렉트 링크가 자동으로 생성되는데, 외부 블로그에 대해선 그런 기능이 작동하지 않더라고요. 더군다나 본문 아래에 트랙백 표시가 생기기는 하는데, 역시 링크는 비활성화되어 있고요. 그것도 모자라서, 블로그 메인화면에선 트랙백 표시가 아예 생성되지 않고, 그 글이 포함된 카테고리를 거쳐야만 트랙백 표시가 뜨는 걸 보니, 화딱지가 나서. -_-;

    트랙백을 삭제하신 줄 알고 제 글에서도 트랙백을 삭제하고 다시 보내려 했는데 계속 실패가 뜨네요. 이건 시스템적인 문제라 저도 어찌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검색노출도 ㅎ_ㅎ; 그런 면에서도 충실하게 작용하고 있겠네요. 새삼 생각하니 좋은 선택이었단 생각이 듭니다. 그보다는 놀이에 가깝습니다. 불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 부끄럽게도 전공자치고는 불어를 지독하게 못합니다 ─ 그냥 썩혀두지 않고 싶기도 하고, 지금은 게을러서 손을 떼고 있지만 언제고 좀 더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볍게나마 연습해두고 있는 거지요. 아. 이건 별로 적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일종의 지적 된장질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나 불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야!' 뭐, 그런 거요.
  • 비르투 2009/12/22 00:43 # 답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1%의 잘못이라 여기고 자기 책임은 아니라며 회피하는 것, 정말 큰 문제죠.

    다만 글이 너무 빽빽해서 읽기가 불편하군요. 적절히 엔터를 쳐서 줄을 나눠주시면 읽기가 편할 것 같습니다.
  • icelui 2009/12/22 09:15 #

    그것이 문제임을 자각하는 문제의식이, 심각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겠죠. 제가 잘 모르겠는 건 그게 일부의 사소한 경향인가, 군중심리로까지 고착화해가고 있는가 하는 점인데, 주변사람들과 가끔이라도 얘기해 보면 생각처럼 심각한 건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민노 씨가 지적했듯 '1% 개념을 상징적 차원'에서 수용해, 말하자면 정확한 겨냥을 위해 과녁을 최소한의 것으로 상정하는 뭐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아서요. 그렇다면 최종적으로는, 운동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1%'의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그 개념이 생략한 현실적 맥락들에 감각을 열어두는 태도가 필요하겠다 싶습니다.

    혼자 쓰고 (거의) 혼자 읽고 하다보니 가독성을 생각해서 글을 쓰는 법을 잘 모르는 것과 따로 정리해서 쓰지 않고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바를 다 적어내리는 점 때문에 그런 불편이 생긴 것 같아요. 가끔 트랙백을 적게 되면 보다 읽기 편하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2009/12/24 01:2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icelui 2009/12/29 11:31 #

    제가 평소에 이글루를 로그오프 상태로 접속하기 때문에 비밀덧글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이 덧글을 찾는 것이 좀 늦어졌습니다. 해주신 얘기에 대해서는 레이니님 블로그에 찾아가 대답을 드릴까 합니다. 가는 김에 어떤 점에서 비슷하다고 느꼈는지도 좀 살펴볼 생각입니다.

    사실 저도 그런 게 좋습니다. 어떤 공감대가 있다면 그걸 느끼는 것으로 족하지,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걸 억지로 표현해야 한다고 느끼는 건 일종의 정도가 미약한 강박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지금처럼 어쩌다 내키는 말이 있다면, 특히 지금 써주신 부분 중에 '생각의 깊이라거나 …' 이 부분처럼 그런 꾸밈없는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런 걸 적어주시는 정도의 수고만 조금 기대하고 싶습니다. ㅇ_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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